슈퍼맨은 없다

박천(시안미술관 큐레이터)


예술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있어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명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와 작업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와 같이 되묻는 것이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이 논리적인 신빙성을 갖추고 관객과 만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스스로의 물음을 재차 확인한다. 이 고리타분한 물음에 있어 예술가(이론가)들이 저마다 여러 답들을 내놓았지만,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예술의 답변(속성) 중에 하나는 그 시대를 기록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대의 한계에 맞서 새로운 모델을 제안한 작품을 위대한 예술이라는 레이어로 미술사의 한 쪽에 끼워두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과 선구안을 지니고 있었을까.


당연하게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전체를 전지적 시점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힘세고 친절한 우리의 이웃이자 외계인인 ‘슈퍼맨’도 세계를 한눈에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래서 슈퍼맨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가령 슈퍼맨의 존재가 사실이라 치고, 그의 성격과 행실이 만화나 영화에서 본 것과 같더라도 슈퍼맨은 먼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그래서 세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만 지키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 결국 미국에 살고 있는 슈퍼맨은 세계의 한 부분인 미국만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오늘날의 매체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이라는 한계를 지닌 예술가 또한 세계를 편협하게, 부분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시대를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부분 안에 이미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메를로 퐁티는 ‘부분’은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고, 이러한 ‘부분’은 전체를 형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이 신체적 한계에 의해 일상적이고 감각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가가 무엇을 보고 성장하였는가에서부터 그 예술가의 예술론 혹은 창작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찾아보더라도 예술가의 창작 동기가 일상적 경험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경험을 의식적으로 끄집어내든, 잠재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든 말이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박소현 또한 무엇이 예술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일상생활의 평범하고 감각적인 경험 그리고 환경적 요소에서부터 작품의 서사가 시작됐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하다가 고등학생 때 부친의 직장으로 인하여 해외에서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의 대학을 끝으로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자 다시 돌아왔지만, 사회 초년생이었던 박소현에게 작업실은 레지던시 혹은 아주 작은 공간이 전부였다. 때문에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늘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던 생활방식이 종이, 실, 건식 재료(연필, 펜, 목탄) 등과 같이 이동과 휴대성, 자유도가 높은 재료를 주로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박소현은 이러한 재료의 특성을 작업의 서사에 녹여내어 작품 자체에서 읽을 수 있는 레이어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한다.


〈89 (2016)〉와 〈그그그 (2017)〉등의 작품은 그녀의 조부와 헤어지는 시간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기억(만남)과 상실(이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주제로 다룬 그녀의 초기 시리즈는 보편적인 인간이 겪게 되는 상황과 감정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와 같은 사건이 거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크게 특별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지극히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경험과 감정들까지 일반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반문해 본다면 쉽게 긍정하기란 어렵다. 그렇기에 인류라는 전체에서 박소현이라는 부분이 차지하고 있는 경험이 작품(예술)이 되어 관객과 만났을 때, 관객을 통해 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하게 된다.


박소현은 조부와의 이별 과정에서 기억이 상실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어쩌면 있는 것과 없는 것(있었던 것), 보이는 것(보고 싶은 것)과 보이지 않는 것(보고 싶지 않은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실존적 불안부터 파편화된 정체성,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관에 의해 취사선택하는 확증 편향적인 사회적 문제까지. 그렇게 박소현은 개인전 《확대된 세계 (2019)》에서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오류에 대해 질문하였다. 〈x140 (2019)〉이라는 작품처럼 형상이나 색에 대한 계획 없이 무작위로 드로잉하여 조립하기도 하고 〈내가 보는 세상, 네가 보는 세상 (2019)〉에서처럼 플라톤의 동굴 이론을 참조한 것과 같이 물질(실)과 조명 그리고 그림자를 통해 작품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비슷한 것들 (2021)》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에서는 박소현이 드로잉을 할 때 가장 자주 쓰는 세 가지 선(정교하게 겹쳐진 선, 절취선 같은 단선, 휘갈긴 거친 선)으로만 제작한 작품의 전시를 진행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보편과 개인(〈89 (2016)〉, 〈그그그 (2017)〉)’이 아닌 ‘보편과 개별(〈비슷한 것들 (2021)〉)’의 이야기를 더 심도 있게 끌고 왔다. 개인의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하고 상상이나 감정이 침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성한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드로잉의 궤적은 종이 위에서 거의 같은 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 궤적을 화면 위에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비슷한’ 이미지들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비슷함’은 ‘다름’이라는 의미로 치환할 수 있는데, 풀어내자면 이미지들이 한 공간에 같이 있을 때 ‘전체’가 될 정도로 이질감 없이 어울리기도 하지만 결국 이미지들은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는다. 정리하자면 2019년을 기점으로 박소현은 개인적인 질문을 넘어 실존, 불안, 정체성과 같은 오늘날의 시대적 질문과 이웃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리즈(〈Vertical Sky (2022)〉, 〈Sandstone (2023)〉)으로 넘어오면서 박소현은 그동안 이어오던 모노톤의 건식 재료에서 벗어나 컬러를 입히기 시작하였다. 또한 어렴풋하지만 형상이 등장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로잉에 가깝다. 어떤 대상을 의식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에 맞춰 선을 지속적으로 이어 쌓아가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그녀가 그리는 대상은 원본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을 확대하면 경계는 허물어지고 픽셀만이 남는다. 그 픽셀 중 비슷한 성질의 것들을 따라가며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또 다른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사진을 찍는다는 것도 전체의 특정 시간과 장소의 부분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선택한 이미지를 확대함으로써 경계가 사라지는 것처럼 원본도 사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전체를 부분에 가두는 것이다. 색을 통해 그것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대략적인 유추만이 가능할 뿐이고, 작품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부분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선영이 박소현의 개인전 《부분의 부분 (2023)》에 대한 평문에서 “전체는 드러나 있지 않기에 변주가 얼마든지 가능한 열린 작품”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를 풀어내면 박소현의 최근 작업은 개별적인 것들이 보다 큰 예술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세계가 항상 작은 것으로부터 변화하고 흔들림으로써 진화하는 것처럼, 예술 또한 작은 시도를 통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불빛을 밝히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기 때문이겠다.


산업혁명 이후 불 꺼지지 않는 도시의 등대들이 들어섬과 동시에 인간은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작품으로 밝히는 서사는 그녀의 이야기이면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두에 등장했던 슈퍼맨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가 얼마나 굉장한 능력을 지녔든 간에 일상에서 감각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라면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아무리 뛰어난 선구안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슈퍼맨도 불가능하듯이 시대를 가로지를 수 없다. 예술가들도 일반적인 사람처럼 시대의 한계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시대적 한계의 경계에 서서 그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펴본 바와 같이 박소현은 20세기 미술이 획득한 질문과 방법론을 차용하여 다시 동시대에 맞춰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를 담은 부분’이라는 아주 작고 개별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대 미술과 오늘날의 사회를 조금이나마 담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