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의 부분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소현 전에 출품된 얼룩덜룩한 이미지로 가득한 작업에는 최초의 출발에 사진이 있었다. 작가가 여행에서 찍어온 청명한 하늘과 대조되는 붉은 대지의 조합이 있는 풍경 일부는 시료가 체취 되듯이 조금 잘려져 나와서 컴퓨터 상에서 거듭되는 확대 과정을 거치고 선택되어, 종이 위에 과슈 드로잉으로 옮겨진다. 성근 입자들이 겹쳐진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먼지나 황사 등을 확대한 이미지 같지만, 실제 대상은 붉은 모래 사암이다. 하기야 사암도 부수어지면 먼지나 모래가 될 것이다. 이전 전시에서는 같은 사진의 푸른 하늘의 일부를 잘라서 같은 과정을 거쳐 마치 세포가 분열하는 모습 같은 이미지들을 그리기도 했다. 수많은 풍경 중의 일부를 선택한 후, 그 안에서 확대를 거듭하여 계속 선택하는 과정은 최초의 대상을 사라지게 한다. ‘부분의 부분’은 전체를 생략하기에 관객은 시각적인 좌표를 잡을 수 없다. 박소현은 ‘부분의 부분’을 담은 화면들 안에 수직 수평으로 빈 공간을 남겨두어 그것들이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전체는 드러나 있지 않기에 변주가 얼마든지 가능한 열린 작품이다. 반투명한 박피들처럼 겹치는 이미지는 원자핵과 전자들 사이의 빈 공간처럼, 허상 같아도 엄연한 실재의 부분을 이룬다. 개중에는 고급 목재인 호두나무 액자와 투명 아크릴판에 끼워서 부분으로서의 취약함을 보강한다. 18x12.5cm 크기의 작품은 나무 액자 고유의 색과 어우러진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은 100x70cm 크기의 작품 12점 연작이 자석을 내장한 틀에 설치된다. 액자에 끼운 것이든 벽에 설치한 것이든 일정한 크기의 종이에 비슷한 색감으로 드로잉 한 연작이다. 어릴 적 추억이 있는 한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을 픽셀 형태가 보일 때까지 확대함으로써 보이는 형태와 질감에 주목했다. 픽셀은 정사각형 픽셀이지만 그것을 선으로 해석한다. 사진을 확대하는 과정은 명확한 대상을 잘게 쪼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더 자세히 볼수록 흐려진다. 작가는 가까이 보기/ 멀리 보기에 삶에 대한 태도와 연결 짓는다. 우리는 등잔 밑 어두운 것 모르고, 멀리 있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이 도그마가 되고 상투형이 되어 상식이라는 것을 만든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사진론이자 예술론인 [카메라 루시다]에서 ‘studium/punctum’을 구별했을 때, 그가 진정한 의미의 예술에서 피하고 싶었던 확실성이 바로 상식이다. 실증주의처럼 현실의 단단함을 믿는 상식은 불확실성에 가득한 것, 특히 예술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애초에 확실/ 불확실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연에 불과한 것들이 고착되어 경계가 된다. 사회가 쳐 놓은 수많은 경계들의 허무함을 알 때쯤이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새로운 세대는 다시 그 경계를 맞닥뜨린다. 문화가 규정된 약호에 지배된다면, 예술은 약호를 벗어나는 것이다. 박소현의 시리즈 작업은 불확실성의 대해(大海) 그 자체다. 맥락에 따라서 전체 풍경을 추측할 만한 작품을 함께 전시하기도 하지만 [부분의 부분] 전은 먼 거리에서 더 정확해지는 정황을 생략한다.
이 전시 부제는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 영감 받은 것으로, 부분들로 전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부분 또는 전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내용과 관련된다. [부분과 전체]는 과학이 총체적 진리를 담을 수 있고, 총체성은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고전적 세계관의 상대성을 말한다. 요컨대 진리는 ‘불확정적’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작가는 진리의 단단한 기반을 통계학적 가능성으로 해체한 것으로 파악한다. 작가는 부분만 파악가능한 진리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는다. 전시된 것 말고도 많이 제작된 시리즈들은 하나의 진리를 포기하고 얻어진 다양함을 향유하는 장이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논지가 맹목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불가지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조물주가 주사위를 던지는 듯한 통계학적 진리는 나름의 신념에 기반한 도그마를 거부하고 더 겸허하게 그래서 더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사고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계속 확대하면서 부분을 선택할 뿐, 상상을 개입하지는 않는다. 부분들의 행렬 그 자체가 환상적이다. 흙과의 관련을 맺고 있다고 믿어지는 브라운 계열 색상의 얇은 막들이 부분적으로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형상은 부분마다 농담과 밀도가 다르다. 유명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에 대한 전형성을 해체하는 최초의 풍경은 SNS에 넘쳐나는 인증사진과 거리가 멀다. 그곳에 가 있는 이의 모습은 물론, 시간과 장소는 특정되지 않는다. 박소현의 작품은 베트남의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던 붉은 사암의 느낌을 미시적인 차원에서 구현한 것이다. 한 뼘에 불과한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한다. 그 영역의 선택이 완전히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발표되는 작업은 2019년 자신의 드로잉들을 컴퓨터에서 합성하다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드로잉의 검정 잉크를 확대했더니 다른 색들이 나온 것이다.
검정 자체가 모든 색의 혼합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려줌과 동시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계획 없이 손 가는 데로 그린 잉크 드로잉 140점을 포토샵으로 붙여나가자 서서히 나타난 것은 무의식의 풍경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실험했듯이, 이전에 그린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어가며 만들어진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는 보이는 확실한 것보다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A4의 1.5배 정도 크기의 종이에 1장 그리는데 이틀 정도로 그리는 촘촘한 작업이라 초현실주의처럼 ‘자동기술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종적인 결과가 예측되지 못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이전의 형상을 모르는 채 이어지는 형상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에서 시각적 무의식이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박소현이 전체에 대한 사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편견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확대된 풍경 이미지는 작은 부분들을 드러내고 이 부분들의 변주는 끝없이 이어진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작가는 사진이나 드로잉을 픽셀의 형태로 보면서 하나의 색 대신에 생각지 못한 여러 색의 공존, 즉 ‘비슷한 색들은 있었으나 같은 색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놀라움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일상어에서 이미지가 ‘깨진다’는 표현을 쓰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편견이 깨짐을 본다. 박소현은 동일함과 비슷함의 대한 차이를 이전 작업 [비슷한 것들](2021)에서 실험 한 바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붓질을 세 가지 정도의 선으로 제한해서 화면을 채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자주 쓰는 선들로 ‘정교하게 겹쳐진 선, 절취선 같은 단선, 휘갈긴 거친 선...’의 예를 든다. 이 세 가지 선들을 중첩시키며 채워진 화면들에 대해 작가는 ‘제한된 선들의 반복이기에 각 이미지는 얼핏 서로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모두 다르다. 이미지의 구도, 연필의 진하기, 선의 굵기, 방향, 겹침 정도 등 모든 요소가 제각각이다’고 하면서 다름을 강조한다.
미셀 푸코가 재현의 관습을 깨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논의했듯, 참조 대상의 확실성을 가정하는 동일성과 달리, 비슷함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열을 이룬다. 과학 또한 무엇인가 정확히 재현할 수 있다는 가정이 무너졌다. 현대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세계는 결정론에 근거한 고전과학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홉스 같은 엄격한 결정론자는 우주가 시계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주를 조각으로 분해해서 과학의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홉스는 사회를 구성 부분으로 분해한 후에 그들의 움직임으로부터 단순한 인과적 힘을 찾아내려 했고, 인간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형에 불과했다.
‘통계적인 자료를 수집하던 사람들은 그런 자료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확률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는 사실’(필립 볼)을 강조한다. 박소현의 작품은 ‘수를 세는 좋은 방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확실한 통계’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을 취급하는 확률의 세계’(필립 볼)를 다룬다. 눈에 보이는 실증적 현실을 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미지의 몫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박소현이 참조하는 양자역학에 바탕한 인식론은 ‘확률을 문제의 핵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뉴턴 역학의 결정론적 세계를 무너뜨렸다’(필립 볼)고 평가된다. 필립 볼에 의하면 양자역학에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 수가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박소현이 파고드는 지점은 법칙이 아니라 새로운 물리학이 강조하는 확률에 있다. 그것은 작가가 동일성이 아니라 유사(비슷한 것)를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통해 ‘보는 것과 인지하는 것의 차이를 실험하고 더 나아가 기존 편견들의 재구성 혹은 해체되는 지점에 집중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