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의 감성의 거울 – 기억과 심연사이 (2018)

1.
박소현의 작업은 일상의 경험, 그것도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기억에 관한 것이다. 이 기억은 감성의 거울 너머 심연을 보고 심연이 나를 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가장 먼저 주목 하게 되는 것은 음식을 그린 ‘마지막 만찬’이다. 박소현의 ‘마지막 만찬’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이는 상,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목탄과 잉크로 그렸다. ‘마지막 만찬’은 미래의 제사상을 상상하고 그린 것이다. 제사상에 대한 선입견과 원칙을 버리고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린 그림이다.

박소현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와서 한국에서 음식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피자, 냉면, 김밥 그리고 고기만두에 햄버거 등 평소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친구와 가족이 함께 먹었던 음식 그림이다. 그림과 쌍을 이루듯 그림 아래는 개인의 기억을 글로도 쓴다. 연필그림과 글맛이 공감각적 이다. “요리는 손맛 이라지 수제 버거는 어딜 가나 맛있다”, “개인적으로 팥은 싫어하지만 붕어빵은 예외” 등이 있다. 마치 그림일기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과 글이 겹쳐지면서 나 역시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깊은 심연의 골짜기에서 소중한 기억이 하나 둘 되살아나 내가 그렸던 그림일기가 떠오른다. 이렇게 글과 그림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박소현의 그림은 박제된 감성에 거울이 된다.

2.
“할아버지는 일편단심 한 이용원만 다니셨다. 이사를 갔어도 버스를 타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고집불통이셨다.” 이 글은 종이위에 과슈를 바르고 파스텔로 드로잉을 하듯 문장으로 쓴 그림이다. 그림은 없고 글만 있다. 글인 그림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이 생각의 그림을 그리는 그림이다. 일련의 숫자를 제목으로 한 이 작업 연작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깊게 새겨진 글로 쓴 그림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에서 가장 깊게 그리고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던 기억을 작업으로 한 것은 치매를 앓는 과정에서 기억이 점점 지워지는 것을 기록한 작업인 ‘그그그’ 연작이다. 원고지처럼 칸을 손뜨개로 짜고 그 위에 글씨를 새기듯 짜놓은 ‘그그그’ 중에서 텅 빈 곳 한쪽에 ‘저 사람이 누고’라고 새겨놓은 글은 지우개로 지운 듯 점점 기억이 사라지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보고 할머니에게 묻는다. 기억이 점점 지워지고 있는 것을 기록하는 박소현의 감성이 마치 거울처럼 나를 보게 한다. 그렇게 나를 보는 것은 나의 기억과 기억 너머에 있을 심연으로 이끈다. 기억의 층을 따라 눈을 감으면 어느 듯 심연 속이다. 감성거울이 나를 비추면 다시 눈을 뜬다. 눈을 떠 박소현의 글인 그림을 보면 감성거울이 기억과 심연 사이를 비춘다. 박소현의 글과 그림이 가진 힘이다.

나아가 증상이 심해질 때 나타나는 반복된 언어, 그리고 점점 언어가 지워지는 과정을 보면서 그 과정을 표현하는 작업은 보다 섬세하게 감성의 결을 담아낸다. 이번에는 손으로 종이를 접고 펴는 과정을 통해서 기억이 사라지고 흔적만을 남긴다. ‘손-종이접기’연작이다. 박소현은 누런색의 용지를 손으로 접어서 생기는 흔적을 작업으로 한다. 일정하게 선을 긋듯이 접힌 것이 점점 구겨진 듯 복잡해지다가 말없는 흔적도 점점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는 공간이 넓어진다. 이 작업은 마치 거울 앞에서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만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만져지지 않는 깊은 심연 속 어딘가에 있는 공간을 촉각적 흔적으로만 표현한다.

이렇듯 박소현의 창작과정은 가족이나 친구 나아가 동료와 이웃하는 사람에 대한 감성의 결을 감각하게 한다. 이번에 발표한 일련의 작업들 속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마음결을 미술이라는 옷을 입혀 너무나 익숙한 방식으로 새로운 호흡을 불어 넣고 있다. 이렇게 쉬운 듯 자기의 감성을 투영하는 방식인 그림으로, 그림과 글로, 글만으로 쓴, 손뜨개로 쓴 글, 선도 그림도 없는 접지의 흔적으로 마치 감성 거울 앞에 서게 한다. 그 앞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영상이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과 함께 새롭게 떠오른다. 역설적이게도 또렷한 그림은 나를 지우고, 사라지는 기억은 또렷한 나로 되살린다.

3.
박소현의 최근 작업은 매일 일기 쓰듯 종이에 드로잉을 한다. 같은 크기의 종이에 연필로 점과 선을 찍고 긋고 칠한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종이와 연필 사이에서 점으로 선으로 존재감을 갖는 드로잉을 한다. 300점이 되면 출판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창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40점을 했으니 지금쯤은 목표 달성을 앞두고 있을 것 같다.

박소현의 작업은 확실히 자신이 경험했거나 하고 있는 주변에서 작업적인 소재를 선택한다. 일상 속에서 미술을 호흡하는 태도가 작지만 큰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경험을 감성으로 호흡하면서 늘 하던 것을 새롭게 보고 감각하고 기록하는 것은 창작의 원천이다. 이러한 원천에서 길어 올린 작업은 각도를 달리하면 그 자체로 새로운 시각적 비전이 열린다. 그러한 비전은 마음이 가 닿는 자리에서 피는 생명의 울림이다.

김옥렬/현대미술연구소 대표